푸른숲출판사
도서정보
공감대화
정병호
2022. 07. 11
18,000원
312/ 페이지
9791156759683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대화는 어떻게 공감과 치유의 도구가 되는가


나이, 성별, 학력, 직업, 출신지역, 국적 등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한 사람에게 한 시간씩 공평하게 이야기 시간이 주어진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다 멈추면 기다려준다. 끼어들지 않는다. 충고도 평가도 칭찬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사람들은 어느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 하지 못해 눈물이 터져 나올 때면, 조용히 함께 눈물짓는 사람이 있다. 지난 10년간, 약 50여 차례, 300여 명이 넘게 참여한 ‘공감대화’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공감대화》는 인류학자, 지리학자, 교육학자, 여성학자, 정치학자 등 여덟 명의 연구자가 함께 쓴 책으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경험한 존중과 치유의 순간들을 포착했다. 다문화 배경 어린이와 청소년, 탈북민, 고려인 청소년, 이주여성, 사할린 동포, 중국 동포, 재일교포, 우즈베키스탄동포, 파독 간호사, 교사, 시민활동가 등 한국사회에서 각자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디에서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참가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위로를 받고 생애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서로에 대한 편견을 낮출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삶의 주인공’ 관점에서 돌아보고 과거의 나와 화해할 수 있었다”며 나만의 ‘해방 일지’를 써내려간다.

《공감대화》는 오해와 편견을 넘어 이해와 존중, 치유의 도구로 ‘공감대화’를 제안하는 최초의 책이다. 한 사람에게 한 시간씩 보장된 평등한 시간과 안전한 공간, 그리고 어떤 이야기라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대화를 열 수 있다. 대화는 공감과 치유의 매개가 될 수 있을까? 대화는 다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모두가 존중받는, 안전한 대화 공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 책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다름을 뛰어넘고 나를 발견하는 환희와 치유의 여정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책을 엮은 문화인류학자 정병호는 2000년대 초, 한국에 온 탈북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공감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5쪽). 남북 청소년이 교류하는 행사에서도 탈북 청소년은 늘 ‘편견이 담긴’ 질문을 받고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하는 입장에 놓였다. 그는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남북 청소년들이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임을 기획했고 그것이 ‘공감대화’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공감대화’는 이주민, 남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고, 2012년부터 한양대학교 글로벌다문화연구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배경의 남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한민족다문화 삶의 역사 이야기’와 ‘경계를 넘는 삶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아홉 살 어린이부터 아흔 살 노인까지, 지난 10년간 300여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 모임을 진행하면서, ‘공감대화’는 점차 진화했다. 공감대화는 “다른 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평등하게 만나며, 정당한 사회적 존재로서 소수자들의 의미를 확인하고 참가자 개개인의 존중과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토론과 비판을 삼가고 판단을 유보하며 상대방의 삶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경청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30분 이상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나자 평소 편견과 차별, 가부장제에 눌려 지내던 이주여성이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6장).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국경을 넘나들며 경제 주체로 살아온 사할린동포 여성의 이야기에 탈북 할머니와 조선족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아팠던 순간을 떠올라 팔로 자신을 감싸 안고 ‘애썼다’고 토닥인다(6장). ‘다문화’라고 놀림 받던 아이들은 그동안의 차별 경험을 마음껏 털어놓고 맞장구치다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1장).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뿐인데 어떤 이는 “위로를 받고 생애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충고와 조언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공간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외롭지 않은 시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고정관념을 떨치고 새로운 눈이 열리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하며 느끼는 해방감!! 그렇게 대화 모임을 거듭하며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공감대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10쪽

공감대화는 화해의 도구이기도 하다. 분단과 전쟁, 이념대립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였던 이들이 만난 첫 모임에서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냉전의 한복판을 관통해온 서로의 삶이야기를 들으며, 각기 다른 체제나 이념을 넘어 마침내 서로를 온전한 개인과 개인으로 마주하기 시작한다. 국군 출신 할아버지와 인민군 출신 할아버지가 만나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면서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술잔을 기울인다(4장). 민간인을 학살한 군인의 딸과 학살피해자 유족이 대면한 순간 서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아프게 한 이도 또 다른 아픔과 슬픔을 경험했음을 깨닫는다(4장). 가해와 피해의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특정 이념과 체제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닌 오로지 ‘삶’에 주목하는 공감대화 모임에서는 서로의 상처를 알아봐주는 것만으로도 화해의 가능성이 열린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듣고 긴장하던, 심지어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던 이들은 서로가 냉전 속 열전의 희생자였음이 드러나는 삶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겪은 일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아프게 한 이도 또 다른 아픔과 슬픔을 경험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감대화 과정에서 모든 갈등은 상대적이었다. -132~133쪽

다문화 어린이, 탈북민, 고려인 청소년, 이주여성, 사할린노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생생한 삶이야기,
글로벌 이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대화 지침서


사람과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삶의 경험을 알고 공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대개는 그 과정을 생략하고 지역, 직업, 학력, 가족 같은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상대방을 규정하거나 판단한다. 심지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거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그 최소한의 이해 과정을 생략하기도 한다(257쪽). 사할린동포인 참가자의 “한국에 와서 벌써 14년을 살았는데, 뭐? ‘어데서 왔느냐’ 하는 말은 있지만 ‘어떻게 살았느냐’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는 말은 우리 사회가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사회는 전체 인구에서 이주민이 5%를 넘는 다문화사회에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쓰거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미디어와 가짜뉴스에서 퍼뜨리는 다른 집단을 향한 경계심과 혐오 감정을 어떻게 걸러내야 하는지, 상대방을 편견 없이 대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에 관해 배우고 싶다. 그런 점에서 《공감대화》는 글로벌 이주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대화 지침서가 될 것이다. ‘어디서 왔고, 몇 살이고, 결혼은 했는지’ 대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물어본다면 관계의 질이 한 단계 높아지지 않을까.
이 책은 총 4부에 걸쳐 대화는 어떻게 화해와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타인과의 만남’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지 참가자들의 역동적인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1부, ‘평등한 시간, 평등한 공간: 아이들의 해방 체험’에서는 다문화 배경 초등학생들이 상처를 말하며 서로 연결된 이야기 캠프, 고려인 중학생들이 이산과 이주의 어려움을 나눈 이야기 모임, 통일교육과 다문화 교육을 연결하고자 시도한 한국, 탈북, 다문화 배경 고등학생들이 나눈 공감대화를 소개한다. “다문화여서 주목받거나 놀림 받은 것을 솔직히 말해서 좋았다”, “속이 뻥 뚫리고 마음이 후련해지는 경험을 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아픔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등 이야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 공감하는 장면들을 포착했다. 또한 ‘다문화’라는 명칭을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37쪽), 고려인 청소년들의 한국 적응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52쪽), 글로벌 이주 시대에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98쪽) 등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지영: 솔직히요, 다문화라는 말 뜻 자체는 좋은데 놀릴 때 애들이 “넌 다문화니까 안 돼”라던가 “너는 다문화니까 이상해” 그런 말을 많이 쓰잖아요. 사람 머리에, 아예 다문화라는 말이 머릿속에 부정적으로 박힌 것 같아요.
성식: 다문화가 혼혈이면 혼혈이 아닌 일반학생을 단문화 학생이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40쪽

신잔나: 반명함판 사진. 그거 뭔지 몰랐어요. 그리고 교복에 이름표 새기는 거요. 그거 선생님이 해오라고 했는데 엄마도 모르고 계속 그냥 다녔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왜 말 안 듣냐고 했어요. -59쪽

초희의 질문에 혁진이는 선선히 대답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서 한참 망설이고 질문했을 초희의 마음이 가벼워졌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를 시작한 윤정이는 너무 떨려서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다고 했으나,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자 오랫동안 성찰해온 것 같은 여러 경험과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북한사람’이라는 낙인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89쪽

2부, ‘개인으로 이야기하기: 국적과 이념, 가해자와 피해자의 벽을 넘어’에서는 냉전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체제, 이념, 국적이 규정한 적대 관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가해와 피해의 경계를 허물었는지 밝힌다. 평생 대화를 나눌 수 없으리라 여겼던, 심지어 존재만으로도 치떨리는 분노를 일으켰던 사람의 삶 속에서 ‘나와 공감할 지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온전한 개인으로 만나는 장면에서는 ‘이야기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113쪽).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의 삶이야기는 역사가 다 담지 못한 한민족 이주의 역사의 한 조각을 채워 넣는다(148쪽). 나아가 국민, 국적,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소개하고 그 경계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둥글게 자리한 여섯 명의 노인은 얼굴만 봐서는 영락없이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다. 깔끔한 테이블보와 꽃이 핀 나뭇가지로 장식한 무릎 높이의 낮은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은 그 70대 노인들은 진행자가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 서로 통성명을 자세히 나누지도 않았다. 카메라와 진행자가 노인들을 둘러싸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참가자가 낯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테이블 중앙에 놓인 마이크와 프로그램 안내 리플릿만 보고 있는 이들 사이는 어딘지 서먹하다. -112쪽

공감대화 모임은 한국전쟁과 냉전이 만든 뾰족한 ‘빨갱이’ 이야기를 뭉툭하게 만드는 평등한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차원의 질문과 대화를 이틀 동안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을 전혀 다른 세 가지 시점(남한, 북한, 중국)으로 바라보는 삶이야기들이 하나씩 더해지며 참가자 각자가 확신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한국전쟁을 남측 입장으로 설명할 수도, 북측 입장에서 이해할 수도, 중국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단지 슬프고 아픈 대립의 기억으로만 새롭게 의미화한 것이다. -134쪽

오성희 : 사람들이 다 고향, 다 한 곳이지요. 그런데 저는 고향이 세 곳이에요. (웃음) 제가 난 고향은 일본이거든요. 그다음은 두 번째 제 청춘 시절, 가정 시절 거의 반년 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제가 다시 태어난 고향이 대한민국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 개 고향 가지고 있습니다. -164쪽

그들은 부모나 조부모 세대의 한국 생활 경험을 이야기했다. 또한 삶의 어떤 시기에든 한국을 방문했거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경우 그 이야기도 공유했다. 이때 표준 한국어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약간 어색하고 이상한, 소위 표준어와 다른 한국어로 이야기를 해도 “저런 한국어 표현을 쓰니 저분은 한국사람이 아니야”라는 사람은 없었다. -172쪽

3부, ‘공감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여성, 이주, 가족’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공감하며 연대의 파트너로 연결되는 순간과 공식적인 삶이야기 시간이 끝난 뒤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이어진 비공식적 대화에서의 자매애를 소개한다. 6장에서는 젠더, 이주, 가족과 관련된 기존의 대화 프로그램과 시도하지 않았던, 결혼이주 가정의 자녀와 재외동포 남성 등 이주 경험이 있거나 소수자로서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 남성의 이야기도 포함한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젠더와 세대, 국적을 가로질러 각자의 삶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서로에게 공감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182쪽).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동포들로 구성된 여성단체 조각보의 대화 모임에서 들려주는 삶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라시아 지도가 그려진다(215쪽). 나아가 7장에서는 배려와 환대로 시작하는 조각보 모임이 동창 모임과 새로운 진행자 양성으로, 차별 사회를 바꾸기 위한 연대활동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소개한다.

김미숙 : 저, 질문 하나 할게요. 가정불화 때문에 많이 힘드셨던 것 같은데, 부모님의 이혼이 아이들에게 많이 도움이 됐나요?
이한수 : 어우, 도움이 됐어요. 저는 크게 도움받았어요. 저는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버지가 만약에 그 집에 있었다면 […] 어머니하고도 연을 끊으려고 했어요. -192쪽

김미숙은 국가 간 경계를 넘으며 잃었던 자신의 꿈을 되찾을 기회로 생각하고 이중언어 강사 양성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했다. 그런데 김미숙이 꿈을 찾아 신나게 배울 때 남편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국가 정책이 바뀌면 금방 없어질 직업이니 들어서지도 말라며 “이거는 정책적으로 이용하는 거야. 니네 미끼야 미끼. 다니지 마”라고 했다. 교육받는 7개월 동안은 월급이 없었는데 남편은 “돈 한 푼이 급한데 쓸데없는 곳에 가서 시간을 쓴다”라며 매일 잠도 못 자게 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그래도 김미숙은 결혼 이후 처음으로 뜻대로 밀고 나가 7개월간의 교육도 마치고 이중언어 다문화 강사로서 학교도 배정받았다. -196쪽

우즈베키스탄동포 : 할아버지, 할머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았고 엄마와 아빠도 러시아에서 태어났어요. 블라디보스토크 쪽에서. [그 후] 우즈베키스탄 와서 결혼했어요. 왜냐면 우리 언니가 41년 때 태어났어요. 37년 때 우즈베키스탄에 들어가니까.
북한동포 : 제 조상으로부터 이야기한다면, 제 증조할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 ○○군이래요. 왜정 때 살기 곤란해서 중국 만주에 가서 자리 잡았어요. 연길 위에 작은 마을.
중국동포 : 엄마는 아빠는 평안북도, 할아버지 시대 때 중국 이주해온 것 같아요. 저는 3.5세대 아니면 4세대인 것 같습니다. [소학교] 2?3학년 때까지만 해도 가난했던 것 같은데 식구가 너무 많았고 할머니, 할아버지랑 증조할머니까지 살았던 기억이 나요. -217쪽

참가자들은 북한?중국?우즈베키스탄?남한 등 다른 지역에서 살았지만 가족의 생계를 감당했던 어머니 세대와 함께한 기억, 딸이었기에 희생하고 감수해야 했던 생활의 무게처럼 여성으로서의 삶의 노동이 놀랄 만큼 비슷했다. -220쪽

4부, ‘공감대화란 무엇인가’에서는 공감대화의 이론과 방법을 소개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직접 시행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감대화 프로그램 가이드’를 실었다. 아울러 부록으로 이 대화모임을 계기로 참가자들이 함께 실천한 활동 사례를 덧붙였다.

공감 위기의 시대,
‘타인과의 만남’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공감이란 “자신이 판단력을 유지한 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인지적 능력”을 말한다. 공감은 동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인 ‘친절함’의 바탕이 된다(247쪽).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영어 ‘empathy’를 번역한 말이다. 이러한 공감(共感, 함께하는 또는 같이하는 느낌)은 감정적 느낌을 강조하면서 동감이나 동정sympathy, 연민compassion과 비슷한 뜻으로 자주 쓰이고 있다. 사실 동정과 연민은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정서적 느낌이지만, 공감은 자신의 판단력을 유지한 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인지적 능력이란 의미가 강하다. 다시 말해 공감의 뜻은 ‘상대방과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비슷하다. -246쪽

그런데 고도산업사회로 갈수록 공감 능력이 쇠퇴하고 아예 공감 능력이 마비된 사람도 늘어난다. 더구나 ‘다른 집단’을 향한 경계심은 SNS와 가짜뉴스로 폭넓게 퍼져나가 혐오 감정을 퍼트린다. 아울러 디지털 소통 방식은 폐쇄적 집단편향도 심화한다. 이런 현상은 인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인 글로벌 협동 역량을 약화한다(248~249쪽). ‘공감 위기’의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지키고 다양한 집단과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보인다. 저자는 과거에는 대가족과 공동체 구성원들의 활발한 상호작용으로 공감 능력을 자연스럽게 키웠지만, 핵가족으로 분화한 오늘날에는 이 능력을 키우려면 문화적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250쪽).

공감 훈련 프로그램의 공통 특징은 ‘대화’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자신이 이해한 만큼 말로 표현하면서 소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 차이가 크거나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서로에 대한 편견이 강한 집단 구성원이 공감하게 하려면 다른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문화상대주의적 대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251쪽

실제로 지난 100년간 교육학, 심리학, 인류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진행하는 ‘대화’ 프로그램은 꾸준히 연구되어왔다. 이 책에서는 미국, 유럽 등에서 시도한 대화 프로그램을 소개, 그것이 어떻게 ‘공감대화’와 이어지는지 그 맥락을 소개한다(8장).

1920년대 초 미국의 고등학교 교사 레이첼 데이비스 뒤부아,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마틴 루서 킹, 유럽연합, 독일의 동서포럼 등 이주민과 소수자 집단의 불평등과 차별 문제를 적극 해결하며, 다른 문화의 지식보다 다른 집단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과 관계 개선을 중심에 둔 대화 프로그램을 시도해왔다(252~253쪽). 서로 문화가 다른 집단 간 대화뿐 아니라 사회집단 간 갈등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 북아일랜드의 ‘기억을 통한 치유’, 범죄자나 약물의존증 환자들의 재활과 치료를 목적으로 심리학자가 개발한 ‘치료 공동체’ 등이 있다(256쪽).

독일의 ‘동서포럼’은 독일 통일 이후 동서독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학력, 직업, 지위가 다른 남녀노소 10여 명이 2박 3일 동안 자신의 생애사를 이야기한다. 참가자 중에는 전직 대통령, 기업가, 노동자뿐 아니라 비밀경찰 출신과 고문 피해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지역, 이념, 세대, 성별, 계급, 장애 등 나와 다른 집단을 향한 배제, 편견, 차별,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견고하다. 공감대화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바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경계를 넘어 ‘존중과 화합’으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어쩌면 더딜 수 있다. 하지만 ‘공감대화’의 힘은 오래간다. 이제 우리는 ‘경계’를 넘을 준비가 되었다.

정병호_ 문화인류학자 한양대 명예교수.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친절한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대표다. 지은 책으로 《고난과 웃음의 나
라: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극장국가 북한(공저)》,《한국의 다문화 공간(공편)》 등이 있다.

이향규_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고, 영국 이주 후 두 세계에
걸친 경험을 글로 쓴다. 현재 런던한겨레학교 교장으로, 어린이들이 노스코리언이나 사우스코리
언이 아닌 그냥 ‘코리언’으로 자라도록 돕는다. 지은 책으로 《후아유》,《영국청년 마이클의 한국
전쟁》,《마스크가 답하지 못한 질문들(공저)》, 세상이 멈추자 당신이 보였다(근간)》 가 있다.

김기영_ 교육학자. 경기도 안산다문화작은도서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주배경청소년의 한국
살이와 학교적응에 대한 연구를 위해 공립학교의 돌봄교사와 한국어강사로 취업해 고려인과 이
주배경아동청소년들을 만났다. 세상의 모든 경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에 관심을 갖고 경계넘기
에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지은 책으로《중도입국 청소년의 학교생활(공저)》, 아름다웠던 가게
(공저)》, 논문 ‘고려인 청소년의 정체성 균열과 재구성’ 등이 있다.

조일동_ 문화인류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류학을 가르치고 있다. 미디어 환경 변화와 전지
구적 대중문화 확산이 만든 디아스포라 정체성 정치, 다양한 하위문화 실천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아름다웠던 가게(공저)》, 논문 ‘월경하는 대중음악 경험과 다층적 정체성 실천’, ‘악보에
서 소리로: 한국 대중음악 녹음·기술·실천에 대한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문현아_ 젠더정치 연구자. 서울대 국제이주와포용사회센터 책임연구원이자 연구공동체 건강과대
안에서도 활동한다. 젠더, 돌봄, 건강, 이주, 사회 불평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엄
마도 때론 사표내고 싶다》,《돌봄노동자는 누가 돌봐주나(공저)》,《페미니즘의 개념들(공저)》이 있
으며 옮긴 책으로《세계화의 하인들》,《경계없는 페미니즘》,《커밍업 쇼트》,《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등이 있다.

최은영_ 지리학자.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북-중 경계 지역을 비
공식적으로 넘나드는 북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활동과 연구를 했으며, 난민, 동포, 탈북민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지은 책으로 《한반도의 신지정학: 경계, 분단, 통일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공저)》,《평양과 혜산, 두 도시 이야기: 북한 주민의 삶의 공간(공저)》,《아름다웠던 가게(공저)》,
《Research Companion to Border Studies(공저)》 등이 있다.

이해응_ 여성학자, 여성정책 연구자. 이주민과 성평등 정책에 관심이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
어중문학을 전공, 한국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parité'! 성적 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공역)》가 있다.〈제주도민 성평등
의식 실태조사〉, 〈제주지역 이주여성 한부모의 생활실태 및 정책 지원 방안〉,〈제주지역 여성의
정치대표성 확대 방안〉 등의 보고서를 썼다.

윤은정_ 스토리가드너. 자기 말과 자기 글로 삶을 성찰하고 성장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한
다. 그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릴레이 전시 〈시민의 성장〉을 기획하고 있다. 삶이야기 참가자
들과 함께 지은 책 《Herstories, 다시 만난 코리안디아스포라 여성들의 삶이야기》가 있다.

1부 평등한 시간, 평등한 공간: 아이들의 해방 체험

1장 한국에서 ‘다문화’로 산다는 것: 상처를 말하며 서로 연결되다 이향규
다문화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까지 | ‘솔직 토크’를 위한 질문들 | 공감의 말들 | 타인이 나를 부르는 말에 대하여
2장 고려인 청소년들의 흔들림과 어울림: 이야기할수록 단단해진다 김기영
고려인, 다문화 학생, 그리고 중도입국 청소년 | 라이프사이클, 청소년 삶이야기의 시작 | 헤어짐과 이산: 중도입국 청소년들의 공통 감정 | 태어난 곳, 사는 곳, 살고 싶은 곳
3장 한국, 탈북, 다문화 학생의 만남: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 이향규
‘삶이야기’의 확대 | 사람책 도서관, 타인을 향한 고정관념과 편견 돌아보기 | 내 이야기를 하는 시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 지금 걱정하는 것 | 네 이야기를 듣는 시간: 내 상처 보기 | 대화는 다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 통일한 사회, 나의 삶 상상하기 | ‘타인과의 만남’을 배우다

2부 개인으로 이야기하기: 국적과 이념, 가해자와 피해자의 벽을 넘어

4장 냉전의 한복판을 관통해온 사람들: 다름을 이해하고 같음을 뛰어넘기 조일동
온전한 개인으로 만나다 | 모든 삶이야기의 시작점 | 대화는 어떻게 화해의 도구가 되는가 |이야기하기, 경청하기, 묻고 답하기 | 차별의 토로는 차별의 시선을 거둔다
5장 밀려났다가 돌아오고 정착했다가 떠나는 사람들: 경계를 초월한 경험 문현아
역사를 현실로 살아낸 사람들 | 고향의 정의 | “앉은 자리에서 세 나라를 겪은 셈입니다” | 글로벌 이주 시대에 맞는 질문

3부 공감의 연결 고리를 찾아서: 여성, 이주, 가족

6장 젠더와 가족: 경계를 넘어 차별과 억압 경험을 나누다 최은영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 화해하기 | 가족이라는 아픈 속살을 드러내다 | 결혼이주 여성에게 안전한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 가장이 된 여성들, 국경을 넘다
7장 다시 만난 코리안 여성들: 사적이고 작은 이야기로 이산의 역사를 꿰다 이해응·윤은정
첫 만남, 마음의 벽을 허무는 장치들 | 100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삶의 여정 |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삶을 말하다 | 진행자는 어떻게 공감의 조력자가 될 수 있는가

4부 공감대화란 무엇인가

8장 공감대화의 이론과 방법 정병호
공감의 위기 | 공감 능력과 대화 | 공감대화 프로그램 | 삶이야기의 힘 | 존중과 화합을 위한 공감대화
9장 공감대화 프로그램 가이드 정병호
참가자 | 진행자 | 프로그램 진행 | 시간과 공간 구성 | 통과의례 | 진행 주체와 비용

부록 공감대화 사례: 여섯 번의 1박 2일, ‘시민’이란 이름으로 연결된 사람들 김기영
후주

공감대화는 말보다 자리에 의미가 있다. 즉, 이야기 내용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라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울림을 준다. 또한 삶이야기는 신기하리만큼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을 느끼게 해준다. 비유하자면 개개인의 삶이야기는 단편소설 같아서, 매번 모임마다 한 권의 소설집이 만들어진다. 때로는 주제가 연결된 하나의 장편소설이 되기도 한다. 저자들이 눈앞에서 들려주는 그 자전적 소설은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감동과 재미를 안겨준다.
--- p.12

우리는 다문화 학생을 1:1로 인터뷰하는 대신 또래 아이들이 둘러앉아 각자 겪은 차별 경험이 어떤 것이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즉, 이 모임은 다른 ‘삶이야기’ 프로그램 참가자처럼 스스로 구성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을 중심으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 pp.22~23

2016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중도입국 청소년 57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학교 적응과 진로에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로 한국어 미숙을 꼽았다. 또한 이들은 부모를 따라 이주한 것으로 이주 결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나는 이들이 이주 경험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지, 이들을 정말로 힘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려 했다.
--- pp.52~53

‘고려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마인드맵을 그리고 그중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말해보라고 하자 청소년들은 라면, 비빔밥, 드라마, 염색 머리, K--- p.pop, 한국어 공부, 인스타그램, 안산,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그런 사람’ 등을 거론했다. 이러한 구술자의 발화發話 속에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으로 수렴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의 삶과 의식을 드러내는 내용이 담겨 있다.
--- p.61

삶이야기를 청소년 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이야기 나누기로 배경이 다른 청소년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사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이를 통일 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남북한의 오랜 분단이 초래한 두 체제 사람들 간의 단절을 이야기로 연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고자 서로 배경이 다른 고등학생들을 모아 삶이야기 캠프를 진행했다.
--- p.72

오후에는 어색함을 해소하고 친밀감을 쌓기 위한 활동을 했다. 둥그렇게 서서 상대방의 어깨 주물러주기, 풍선에 상대방 얼굴 그리기 같은 가벼운 활동으로 시작해 두 조로 나눠 협력 게임을 했다. 조원들이 눈을 가리고 긴 줄로 정삼각형 만들기, 동작만으로 단어를 표현해서 알아맞히기, 파스타 면과 테이프와 실을 이용해 탑 높이 쌓기 등은 간단하고 흥미로우면서도 팀워크가 필요한 게임이었다. 참가자들은 몰입하면서 즐거워했다. 사전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순서는 사람책 도서관Human Library이었다.
--- p.78

상처는 말하면서 드러났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듣는 이는 숙연해졌다. 타인의 이야기가 묻어둔 내 상처를 건드린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 말하는 사람은 그저 예사로운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듣는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의 삶이야기를 하다가 자신 안에서 다른 이를 만나고, 다른 이의 삶에서 자신을 만난다.
--- p.87

우리는 공감대화가 단순한 상호 이해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화해 방향과 실마리를 모색하는 작업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꼼꼼히 짚어보고자 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이날만큼은 대화 모임 현장에서 정치나 이념 이야기와 공격적인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진행자가 더욱더 미리 단속하고 조정하며 대화를 이끌었다.
--- p.125

삶이야기를 나누는 대화 모임은 가해와 피해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아픔을 극복하거나 이념과 체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삶이야기를 경청하고 평범한 궁금증을 묻고 답하는 대화 모임 과정은 서로의 삶이 드러내는 다름과 그 다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틈새를 열어준다. 함부로 화해와 치유를 말할 순 없지만 대화 모임이 의례적인 시간 구조 속에서 최소한 서로의 삶에 드리워진 굴곡과 아픔만큼은 공감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 p.137

오성희가 자신은 고향이 세 곳이라며 웃음 짓던 그 순간이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국민-국가-국적을 같은 일직선으로 이해하며 그들에게 고향은 대체로 하나다. 반면 삶이야기 프로그램 참가자는 국민-국가-국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이중적 고향이라는 의미가 가능했다. 오성희처럼 딱 집어 고향을 세 곳으로 정리한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 p.164

이제부터라도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는지만 묻지 말고 질문을 바꿔보라고 제안하고 싶다. 즉, 먼저 어떻게 그곳으로 가게 되었는지 물어보길 권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다가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걸까요?”로 질문을 이어가길 제안한다.
--- p.170

국가에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사실에 김미숙은 속병이 났다. 무엇보다 남편이 “자신이 한 말이 맞아떨어졌다”며 자신을 바보 취급하고 이제는 그녀가 무엇을 하든 가르치려 드는 것이 속상했다. 한국에서 한국 국적을 가지고 25년을 살았는데도 또 같은 민족인데도 김미숙은 자신이 여전히 이곳에서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가 자신을 늘 결혼이주 여성, 중국인, 시급 노동자 등으로 부르며 타자화하고 주변화하기 때문이다.
--- p.198쪽

조각보에서는 ‘다시 만난 코리안 여성들의 삶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공감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흔히 탈북민, 조선족, 재일동포, 사할린동포, 고려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말하며 온전히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자리다. 일제강점기 · 분단 · 냉전 역사 속에서 디아스포라가 된 여성들은 다른 체제, 다른 사회, 다른 문화를 경험하며 살았다.
--- p.210

모임을 시작하면 진행자는 먼저 모임의 취지를 소개하고 프로그램 진행 방식을 안내한다. 이때 경청하기, 끼어들지 않기, 판단하지 않기, 충고하지 말기 같은 규칙도 소개한다. 이 규칙을 지킴으로써 대화로 ‘상대방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목표에 닿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어 참가자와 진행자가 자기소개를 한다. 참가자는 이름, 나이, 직업, 고향, 모임에 오게 된 배경 등을 간략히 말하지만 진행자의 자기소개는 좀 더 길고 내용도 구체적이다. 유년기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축약해 약식의 삶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참가자가 자신의 삶이야기를 할 때 참조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 pp.213~214

누구나 삶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어 망설여진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삶을 30분 동안 구술하고 나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삶이야기는 30분 구술이 끝나면 참가자들이 30분 동안 질문해 발표자가 자신의 삶이야기를 완결하도록 돕는다. 이는 마치 주인공의 독백에 이어지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 같다.
--- p.218쪽

남한동포 참가자의 말처럼 삶이야기는 동포 여성들의 “미니 자서전”이자 난생처음 부담 없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시공간’이었다. 서로의 자서전을 경청하고 공유하다 보면 중국동포나 북한동포보다 한국말이 어려운 우즈베키스탄동포의 사정, ‘살아온 경험은 달라도 모두 조선동포’라는 동포 정체성 그리고 북한동포가 한국 국적을 받는 것과 외국인 신분으로 살았던 중국동포나 우즈베키스탄동포가 놓인 현실을 교차해서 이해할 수 있다.
--- p.230

실제로 삶이야기의 많은 참가자가 이야기 도중 눈물을 흘린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고 덕분에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솔직함이 공감과 이해를 낳는다. 그래서 삶이야기 진행자는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마칠 때까지 시간을 지켜준다. 그 시간동안 아무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돕는 데 집중한다. 그뿐이다.
--- pp.239~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