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국 웨스트컨트리 출신의 아무 연줄도 없는 자, 플리머스에서 태어난 가난한 의사(하지만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거듭 말하듯이, 내 가문의 뿌리는 콘월이다), 나이는 44세(따라서 첫 항해에 나서는 의사들의 평균 나이를 훌쩍 넘긴 상태다), 네덜란드인 선장이 지휘하는 5등급 슬루프에 소속된 한낱 보조외과의(하지만 전공을 막론하고 유일한 의사다)일 뿐이었다. 선장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배는 낡았고, 선원들은 지쳐있었다. 게다가 보급품은 거의 바닥났고, 우리가 맺은 계약조건은 극도로 의심스러웠다.
정녕 내가 이런 길을 가려고 했을까?
--- p.12 「1」중에서
흉포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에 맞서기 위해 갑판용 작업복을 꺼내 가능한 한 여러 겹 겹쳐 입었다. 코트 단추를 채우는 중에 선실 창문 밖으로 번개가 번쩍거렸다. 천둥소리가 들이닥치기를 기다렸지만 배에서 나는 소음 탓인지 들리지 않았다.
“항상 번개가 친다니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치 그 말에 어떤 깊은 진실이 묻혀있는 것처럼.
--- p.32 「2」중에서
“이 석호는 정확한 비율로 그려놓은 겁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뒤팽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석호는 끝에서 끝까지 10킬로미터 가까이 되고, 또 균열에서부터 석호가 시작되는 동 끝까지 10킬로미터 가까이 된다면, 이 검정색 표식은 직경이 500미터 가까이 되는데요!”
“더 놀라게 해드릴까? 유로파호의 선원들은 그 요새가 너비만큼이나 높다고 했어!” 토폴스키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가 바른 강하고 자극적인 향유 냄새가 풍겨 왔다. “상상해 봐, 코드. 피라미드를 이집트라는 고름투성이 얼굴에 난 여드름 따위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한 돌무더기라니 말이야. 그런 상상을 하면 자네 같은 사람의 영혼도 막 떨리지 않나?”
--- p.63 「3」중에서
“즐거워 보이는데, 사일러스.” 라모스는 테이블 위로 새 시트를 펼치는 내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게 내 본령이니까요. 나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창조된 겁니다. 그 외에는 모두 부수적일 뿐이죠.”
“당신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로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내 소명보다 훨씬 고귀하군.”
--- p.86 「5」중에서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배의 정체가 아니었다. 바로 항해일지 가장 마지막 부분에 적힌 내용이었다. 그 글은 공포에 질리고 긴급한 상태에서 손으로 휘갈겼다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았다.
나는 탈출했다.
그것이 돌아오고 있다.
도로 나를 끌고 들어가려고 오고 있다.
도로 다른 이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라 , 아직 그럴 수 있을
그 페이지는 대각선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뒤 여러 장까지 손톱으로 낸 홈이 깊게 패있었던 것이다.
--- p.174 「10」중에서
“나는 전에도 죽은 적이 있어요.” 내 나머지 부분이 스스로 문을 닫는 순간, 마치 계절이 바뀌는 마을처럼 내 기억의 문이 다시 열렸다. “내 말이 맞죠?”
백작부인은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번 그랬죠. 굉장히 여러 번.”
“어째서….” 나는 피의 재갈 사이로 말을 하려 악전고투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겁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데메테르호의 현실을,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직시하려 들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의미가 없어요.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까. 다음 시간대에서 만나요, 사일러스 코드 박사님. 그렇게 될 때까지 망자의 잠을 즐기도록 해요.”
--- p.184 「11」중에서
이 공동의 존재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 탐사
목적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 실제로 그 존재를 보게 되자, 우리 아래쪽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텅 빈 공간과 위쪽에 매달려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윗덩어리를 파악하는 일은, 아무리 충분히 예상했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발아래로는 단단하고 의지할 수 있는 땅이, 머리 위로는 바람이 통하고 빛이 비치는 하늘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다. 이런 평범한 사실 관계가 소름 끼칠 정도로 역전되고 나니, 나는 메스꺼운 정신적 뱃멀미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말았다
--- p.201 「13」중에서
“이건 진짜야.” 나는 소리 내 말했다. 마치 그렇게 주장하는 행위만으로 이 버전의 데메테르호에 나 자신을 화학적으로 충분히 고정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이제 이전 버전의 배는 왜곡된 허구의 산물이자 은유적인 그림자, 진실의 불완전한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균열이 있었고, 언제나 구조물이 있었으며, 언제나 먼저 도착한 원정대가 있었다. 이제서야 나는 여과되지 않은 본질을 인식했다.
--- p.245 「16」중에서
내게는 과거가 있었다. 기억도, 감정도, 야망도 있었다. 데메테르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근본적인 현실로 돌아가는 내 여정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꿈 같은 단계였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코실이 다른 무대들은 허구의 이야기였다고 말해줬기 때문에, 착륙모듈 안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도 마찬가지로 같은 추정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손은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졌다 해도, 그것은 나를 또 다른 끔찍한 시나리오로 몰아넣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했다. 아마 나는 미쳐버린 나머지 스스로 만들어낸 정신착란적 사건을 겪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테지만, 이제 나는 온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혼란스럽고 두려우며 내 운명에 확신이 없기는 했지만, 완전히 제정신이었다.
--- p.328 「26」중에서
“내가 전부 제대로 해냈나요, 사일러스?”
“제대로 해낸 것 이상이었어요. 당신은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면 그 계산이… 옳았다고요?”
“옳았어요. 그건….”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으며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아름다웠어요, 레이몽. 모든 추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 모습을 봤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그 아름다움을 목격했어요.”
“아직도 볼 수 있어요.” 그는 마음의 빛이 꺼지기 시작했는데도 기쁨에 젖어 말했다.
--- p.396 「32」중에서
그랬다. 결국 남은 것은 믿음뿐이었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를. 라모스와 다른 동료들이 정말로 집으로 돌아간다고 점지할 수 있기를. 그 점에 대해 한 점 의심도 없기를.
--- p.395 「32」중에서